박서보미술관, 그의 예술이 머물던 서울 연희동에 문을 열다… 개관전은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입력: 2026.08.26(수)
‘누군가의 시간’이 쌓인 자리, 그 곁에서 미술관의 시간이 시작된다.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 박서보(1931–2023)가 생전에 생활하고 작업했던 서울 연희동 작업실 옆에 그의 이름을 딴 박서보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지난 8월 20일 개관식을 진행한 박서보미술관은 한 작가의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기념 공간을 넘어 그가 남긴 예술적 가치와 교육 정신을 동시대 미술과 연결하는 문화 플랫폼을 지향한다.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은 “박서보의 작품 3천여 점과 자료를 체계적으로 연구·보존하는 한편, 젊은 작가를 소개하는 기획전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문화적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서 전시를 따라 걷다 보면 건축과 자연이 만들어내는 여러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건축가 최문규가 설계한 미술관은 지하 2층에서 지상 3층까지 이어지고, 각 층에 자리한 작은 정원은 전시 공간 안으로 자연을 끌어들인다. 가장 아래층에서 시작해 위로 향하는 흐름은 지하에 뿌리를 내리고 땅 위로 생명력을 밀어 올리는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그 흐름의 끝인 3층에는 8m 높이의 정사각형 공간 ‘Cube’가 자리하고, 반투명 유리를 통과한 자연광이 공간 안으로 스며든다.
2026. 8. 21 - 2027. 1. 3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Park Seo-Bo & Huong Dodinh: Emptiness Fullness
박서보미술관
전시의 시작점인 지하 2층 SPACE Ø에서는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의 첫 장면이 펼쳐진다. 2027년 1월 3일까지 열리는 전시는 박서보의 회화 25점과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흐엉 도딘Huong Dodinh(1945–)의 회화 17점, 총 42점을 선보인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조형 언어를 지닌 두 작가는 반복과 축적, 절제를 통해 화면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응축된 밀도를 만들어왔다. 박서보가 물에 불린 한지 위에 선을 긋고 밀어내는 묘법Ecriture으로 행위와 시간을 축적했다면, 흐엉 도딘은 광물 안료를 수십 차례 겹쳐 쌓아 색의 층위에서 빛을 드러낸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쌓아 올린 화면이 결국 ‘비움’으로 향한다는 역설은 두 작가의 회화가 만나는 지점이 된다.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을 선보이는 박서보미술관 SPACE Ø 전시장 전경, photo by 전병철 / Courtesy of PARKSEOBO MUSEUM
작은 정원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흐엉 도딘의 작품 두 점이, 오른쪽은 박서보 작품 한 점이 걸렸다.
이곳에서는 작품의 배치에서 두 작가의 회화를 마주하는 새로운 감각이 생겨난다. 박서보의 작품들이 흐엉 도딘의 작품을 감싸듯 자리하고, 그 사이를 걸으며 서로 다른 두 회화를 한 시야 안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곳에 함께 놓인 두 작가의 1990년대 작품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하지 않지만, 안개 · 흙 · 물 · 바람 · 빛 같은 자연의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박서보가 타계하기 석 달 전인 2023년 7월 그의 작업실을 처음 찾은 흐엉 도딘은 통역을 거쳐 대화를 이어갔지만, 작품에 영감을 준 자연을 이야기할 때는 통역을 멈추게 하며 다 안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박서보의 ‘묘법 No.950628’(1995), 흐엉 도딘의 ‘무제(Untitled)’(1990), ‘B5’(1994) 등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두 사람이 느꼈을 무언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와닿을 듯하다.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을 선보이는 박서보미술관 SPACE 2 전시장 전경, photo by 전병철 / Courtesy of PARKSEOBO MUSEUM
박서보. ‘묘법 No.100915’, 2010, photo by 전병철 / Courtesy of PARKSEOBO MUSEUM
전시를 따라 2층 SPACE 2로 올라서면 색은 한층 선명해진다. 박서보의 한지묘법은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기억을 품은 짙은 흑색에서 밝고 강렬한 색채로 이어진다. 작품을 따라 천천히 거닐다 보면 선명한 붉은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묘법 No.100915’(2010) 앞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 가을날 붉게 물든 단풍을 마주한 듯한 색감에는 자연에서 위안과 치유를 얻기를 바랐던 박서보의 마음이 담겨 있다. 땅 아래에서 출발한 전시가 위로 올라와 자연의 색을 만나는 순간이다.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을 선보이는 박서보미술관 SPACE 3 전시장 전경, photo by 전병철 / Courtesy of PARKSEOBO MUSEUM
박서보. ‘묘법 No.230127’, ‘묘법 No.230128’, ‘묘법 No.230129’, 2023, photo by 전병철 / Courtesy of PARKSEOBO MUSEUM
흐엉 도딘Huong Dodinh. ‘X.K.N.31’(2025-2026), photo by 전병철 / Courtesy of PARKSEOBO MUSEUM
마지막 3층 SPACE 3에 이르면 강렬했던 색채는 사라지고, 거의 백색에 가까운 대형 묘법 세 점이 관람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 지나면 형태와 색을 극도로 절제하고 빛과 물질의 섬세한 흔적만 남긴 흐엉 도딘의 백색 계열 작품들이 자연광을 머금으며 은은한 깊이를 더한다. 그 가운데에는 흐엉 도딘이 박서보와의 만남을 기억하며 제작한 ‘X.K.N.31’(2025–2026)도 자리한다. 지하에서 출발해 색을 지나 빛에 이르는 길을 따라 걷고 나면 ‘비움’은 화면을 넘어 공간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반복되는 행위와 물질, 자연과 건축, 그 사이를 지나온 관람객의 시간이 더해지며 비워진 자리는 또 다른 감각으로 채워진다.
전시를 바라보는 경험은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으로도 이어진다. 박서보가 남긴 일기와 편지를 따라 자신의 문장을 써보는 ‘마음을 채우는 글쓰기’를 비롯해 명상과 앰비언트 음악, 차와 그림을 통해 작품을 경험하는 ‘마음을 비우는 드로잉’, 도슨트 투어 등이 전시 기간 함께 운영된다.
박서보미술관이 첫 전시에서 박서보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흐엉 도딘과의 2인전을 선택한 점도 눈길을 끈다. 한·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번 전시는 박서보를 한국 단색화라는 미술사적 위치에만 머물게 하기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지역에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해온 두 작가의 작업을 나란히 바라보게 한다. 동시에 박서보의 예술을 보존하는 공간에서 나아가 다른 작가와 새로운 대화를 만들어가려는 미술관의 방향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 작가의 시간이 쌓인 자리에서 문을 연 미술관은 이제 다른 예술가의 작업과 그 사이를 걷는 관람객의 시간을 이어간다.
박서보미술관
PARKSEOBO MUSEUM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로 24길 9-54
관람: 화요일(Tue) - 일요일(Sun), 11:00 – 18:00
(월요일 휴관 / 음력 설날·추석 당일 휴관)
관람료: 5,000원 (미취학 아동 무료)
문의: 02. 336. 7927 / museum@psbf.kr
관람 안내: 박서보미술관 홈페이지
Words and Photographs by Koeun Lee
Still. Courtesy of PARKSEOBO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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