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자카르타 2025', 자카르타의 리듬 안에서 젊은 한국 미술을 선보이다
입력: 2025.12.20(토)
올해로 15회를 맞은 ‘아트 자카르타Art Jakarta 2025’는 10월 3일부터 5일까지 지엑스포JIExpo에서 열렸다. 나는 도시 분위기를 미리 느껴보고 싶어 페어가 설치되기 며칠 전 자카르타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 도시는 막 우기로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하늘은 낮게 드리웠고, 공기는 습기를 묵직하게 머금고 있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자마자 비가 내렸는데 창문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방울 너머로 보이는 거리 풍경이 묘하고 낯설었다. ‘페어 내내 비가 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동남아 도시의 리듬을 좀 더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동시에 밀려왔다. 페어가 열리는 첫날 아침, 다행히 날씨가 매우 쾌청해졌다.
지엑스포가 자리한 케마요란Kemayoran은 한때 공항이 있던 지역이었는데 지금은 전시장과 호텔, 오래된 산업 창고가 공존하는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공항 시절 흔적인 넓고 평평한 도로 위로 오토바이와 차들이 쉼 없이 오갔고, 길가에는 오래된 간판과 시간이 멈춘 듯한 창고가 늘어서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을 주었다.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사람들이 더운 공기 속에서도 느긋한 표정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성장하는 ‘아트 자카르타’, 동남아 미술 허브로
아트 자카르타는 2009년 ‘바자 아트 자카르타’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2017년 ‘아트 자카르타’로 새롭게 출발했다. 다른 국제 페어들과 달리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작가들을 중심에 두는 이 페어는 로컬 갤러리 비중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며 참여 갤러리 수를 70여 개로 늘렸다. 이렇듯 지역성을 살리는 동시에 국제적인 감각과 방향성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아트페어를 넘어 동남아시아 미술의 허브이자 플랫폼으로서 그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져가고 있다.
공공 없는 미술, 공동체로 확장되는 인도네시아의 미술 생태계
인도네시아 미술계는 공공 기관이 주도하지 않는다. 민간 자본을 축으로 하여 기업 중심의 미술관이 운영되고, 미술 시장에서는 기업과 개인 컬렉터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러한 구조는 재정 안정성과 기획의 유연성을 동시에 지니며, 시장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할 기반을 이룬다. ‘아트 자카르타’ 역시 라이프스타일 중심 미디어 그룹을 모체로 두고 있다.
이러한 민간 중심의 시장 구조 속에서 인도네시아의 미술 생태계는 다양한 독립 예술공간과 아티스트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22년 카셀 도큐멘타 15 예술감독을 맡았던 루앙루파Ruangrupa다. 그들은 전시 · 출판 · 워크숍 · 연구를 넘나들며 전통적인 미술관 시스템의 경계를 넓히며 공동체적 실천을 예술의 핵심 가치로 삼았다. 이번 페어에는 지엑스포의 다른 홀에서 음악 페스티벌인 ‘싱크로나이즈 페스티벌Synchronize Festival’과 연계해 루앙루파의 25주년을 기념하는 ‘ruru25: Poros Lumbung’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미술 · 음악과 커뮤니티가 한데 어우러진 이 축제는 자카르타의 예술적 에너지가 얼마나 다층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코리아 포커스>, 젊은 한국 미술의 새로운 시선
올해 ‘아트 자카르타’에서 특히 눈에 띈 섹션은 <코리아 포커스Korea Focus>로, 아트미츠라이프AML가 두 번째로 기획한 해외 진출 페어 프로그램이다. ‘더 프리뷰’를 포함하여 젊은 갤러리들과 신진 작가 발굴을 도우며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페어를 꾸준히 선보여온 아트미츠라이프는 이번에 한국예술경영지원센터KAMS와 협업하였다.
행사장 내 별도의 구역으로 구성된 코리아 포커스는 갤러리 12곳이 각기 다른 시선으로 한국 동시대 미술을 선보였다. 참여 갤러리는 에이피오 프로젝트, 별관, CDA, 갤러리 인, FFF, PS CENTER, IAH, 상히읗, 갤러리2, 갤러리 소소, 파이프 갤러리, 띠오였다. 부스마다 크기와 분위기는 달랐지만 ‘젊은 한국 미술’을 보여주려는 에너지가 공간 전체에 흘렀다.
에이피오 프로젝트 부스
CDA 부스 / Courtesy of CDA
PS CENTER 부스 / Courtesy of PS CENTER
에이피오 프로젝트는 모던한 검정색 벽과 대조를 이룬 이미주 작가의 행잉 조각과 대형 회화, 강재원 작가의 조각을 선보였다. CDA가 설치한 백두리 작가 솔로 부스는 노란색과 초록색만으로 빛과 어둠, 삶과 죽음 등의 균형을 탐구한 시리즈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PS CENTER 부스에서 권지영 작가는 연약해 보이는 고리와 항아리 모양 도자 작업으로 여러 형태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정서를 표현하며 젊은 작가의 도예 작업 또한 동남아 미술 시장에서 눈길을 끌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FFF에서는 이한나 작가, IAH에서는 정수정 작가, 상히읗에서는 송민지 작가의 추상 작업 시리즈가 소개되었다.
처음 해외 페어 참여한 ‘별관’의 젊은 작가 넷이 만든 장면들
내가 참여한 별관은 코리아 포커스에 참가한 갤러리 중 유일한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공간)’였다. 크지 않은 부스였지만 젊은 작가 넷이 모두 다른 매체를 준비해 다채로움을 보였다. 윤일권 작가 판화 시리즈는 유년 시절 즐겼던 놀이 장면을 판화 기법으로 섬세하게 표현해 복잡한 페어장에서 관객들 걸음을 멈추게 했다. 닭싸움, 뜀틀, 줄다리기 같은 놀이들이 인도네시아 관객들에게도 어린 시절 기억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가 ‘기억’이라는 언어로 소통할 수 있음을 보였다.
<코리아 포커스>에 참여한 별관의 부스 전경
두껍게 쌓아 올린 오일 회화 물성이 돋보이는 김둥지 작가 작업은 부스 정면에 비정형적으로 배치되어 관객들 눈길을 사로잡았다. 단순한 선과 조형 요소, 그리고 강렬한 색 구성은 별관이 준비한 ‘한국적 노스탤지어’의 조형적 감수성을 관객들에게도 미묘하게 전달했다. 작업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넘어, 색과 형태 그 자체로 보는 즐거움을 전달하며 관객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아트 자카르타 페어장을 통틀어 단연 눈에 띈 사진 매체를 선보인 안부 작가 작업은 매끈하게 그려진 회화인지 혹은 흐릿하게 찍힌 사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계를 탐색하며 오묘한 인상을 남겼다. 우소아 작가 드로잉 작업은 모눈종이에 날마다 날씨를 기록하는 ‘날씨 채집 드로잉’ 중 일부를 선보였다. 그의 작업은 일상의 반복 속에서 발견되는 자연의 리듬과 기운을 시각화하며, 색과 형태를 통해 인도네시아 관객에게 낯설지만 친숙한 정서를 전했다.
별관이 출품한 우소아 작가의 날씨 채집 드로잉 시리즈
별관 부스에서 안부 작가의 사진 작업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모습
서로 다른 언어 작업이 한 공간에 모이면서 별관 부스는 자연스레 ‘한국적 감수성과 동시대성의 교차점’을 보여주는 장이 되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인도네시아 미술계 특유의 커뮤니티적 분위기에서 이 시도가 따뜻한 공감을 얻었다는 점이다. 어느 한 작가나 갤러리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현장 분위기에는, 경쟁보다 상호 신뢰로 엮인 예술 공동체의 힘이 배어 있었다.
자카르타가 남긴 인상은 ‘함께함에서 비롯된 미술’
처음 해외 페어에 참여해 여러 제약 속에서 제한된 매체만을 선보인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또한 ‘코리아 포커스’ 출품작들이 평면 작업 위주여서 한국 미술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완전히 보여주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아 포커스’는 현장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남겼다. 로컬 갤러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주목되며 ‘한국의 젊은 미술 씬에는 이런 작가들이 있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무엇보다도 기억에 강하게 남는 것은 인도네시아 미술계의 강한 커뮤니티 문화가 보여준 유대감(紐帶感)이다. 한국 미술에 대해 묻고, 인도네시아 안팎의 좋은 전시들을 소개하며, 시장 구조와 지역간 맥락을 공유하려는 이들과 대화하면서 자카르타의 미술적 개방성과 따뜻한 에너지를 실감했다. 이러한 유대 속에서 자카르타는 낯설고 어려운 시장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예술을 공유할 수 있는 무대라고 느꼈다. 이번 경험은 단순한 국제 페어 참여를 넘어, 한국의 젊은 미술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며 아시아 미술의 흐름과 함께 성장할 수 있음을 확인한 계기였다.
Words & photographs by Dahyun Heo
Still. Courtesy of Art Jakarta
Still. Courtesy of PS CENTER
Still. Courtesy of CDA
© 리아뜰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