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편집: 2025년08월06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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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를 비추어 인간의 내면을 응시한 정물화 이야기

그 시대를 비추어 인간의 내면을 응시한 정물화 이야기

몇 년 전 ‘프리즈 런던 마스터스’에서 조그마한 꽃 그림이 내 눈길을 끌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작품인데, 빛이 바랜 듯하면서도 생생한 색감과 정교한 붓질로 재현된 꽃잎 하나하나가 마치 방금 화병에 꽂은 듯 생동감을 자아냈다. ‘이런 그림을 나도 집에 걸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한참 그 앞을 서성이다가 값을 물어보았다. 환한 미소를 띤 갤러리 직원 입에서는 그러나 상상치 못한 0들의 집합이 흘러나왔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품에는 뛰어난 17세기 정물화 컬렉션이 있다.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역사가 탄생시킨 걸작들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유럽 사회는 급변했고, 종교화(宗敎畵) 위주이던 미술 쪽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교를 믿는 곳에서는 성경과 관련된 성인 그림과 조각상을 교회에 두지 않게 되었고, 종교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수입원을 잃었다. 전쟁과 경제 쇠퇴로 말미암아 사회도 화려함보다 검소함에 쏠렸다. 그야말로 미술 전반이 쇠퇴일로였다. 화가들은 그림 소재를 종교가 아닌 일상에서 찾으려 했다. 초상화, 풍속화 등 여러 가지 시도 가운데 하나가 정물이다. 그리하여 종교화에서 작은 소품에 지나지 않았던 정물이 17세기 들어 사회 변화가 반영된 어엿한 장르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같은 시대 같은 유럽 안에서 스페인과 네덜란드 정물화가 극단으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 차이에 숨겨진 이스터 에그Easter Egg는 회화 기법이 아니라 당시 두 나라가 맞닥뜨린 역사적 사건들이고, 상징과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본다.

스페인은 대항해시대를 열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떠올랐지만 잘못된 정책 탓에 급속히 쇠퇴하면서 식민지이던 네덜란드와 명암이 엇갈리게 된다. 가톨릭 국가 스페인이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에 가한 종교 탄압과 세금 중과는 80년에 걸친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이어졌고, 여기에 엄청난 전비를 쓴 것도 모자라 네덜란드를 지원한 영국과의 해상 전쟁에서 패해 바다에서의 패권을 잃었다. 그러면서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을 벌였으니 아무리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엄청난 금과 은을 실어와도 경제 파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에서는 가톨릭의 영향으로 종교적 금욕주의가 예술 전반에 스며들어 성스러움과 명상적 분위기를 강조한 소박하고 절제된 화풍으로 드러났다. 특히 스페인의 정물화는 영적 성찰을 위한 ‘묵상하는 회화’로 자리 잡으면서, 그 안에 종교적인 상징을 담고 일상 사물조차 마치 신성한 존재처럼 그려졌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뒤로 해상 무역을 통해 경제 황금기를 맞이한 네덜란드에서는 자본을 축적한 부르주아, 더 나아가 중산층 시민이 예술 소비의 주체로 떠오르면서 화려하고 세속적인 정물화로 나타났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A Cup of Water and a Rose’, 1630년경 / Courtesy of The National Gallery, London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이 물 한 잔과 장미를 그린 그림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한 17세기 스페인 정물화에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단출한 정물 위로 첫새벽의 은은한 빛이 드리워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물건인데도 고요하고 신비한 느낌이 든다. 얇게 빚은 자기 컵 안에 담긴 물의 잔잔함과 은쟁반 위에 놓인 장미의 핑크빛은 언뜻 보기에 부조화스러운 듯하지만 여기에는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종교적 메시지가 담겼다.

빌렘 칼프Willem Kalf. ‘Still Life with the Drinking-Horn of the Saint Sebastian Archers' Guild, Lobster and Glasses’, 1653년경 / Courtesy of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암브로시우스 보스샤르트Ambrosius Bosschaert the Elder.A Still Life of Flowers in a Wan-Li Vase on a Ledge with further Flowers, Shells and a Butterfly’, 1609-1610

빌렘 칼프의 그림은 이른바 ‘과시적 정물화Pronkstilleven’인 네덜란드 그림이다. 사치스런 요리인 붉고 커다란 랍스터, 희귀한 수입 과일 레몬, 고급 와인잔, 터키산 양탄자, 반짝이는 은제 식기. 모두가 부유함과 교양을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물론 해상 무역을 독점한 네덜란드의 위세가 배경에 깔렸다. 화가는 이것들을 한껏 기교를 부려 다채로운 색상과 질감으로 표현했다.

Frans Hals. ‘Young Man holding a Skull (Vanitas)’, 1626-1628 / Courtesy of The National Gallery

Jan Jansz. Treck. ‘Vanitas Still Life’, 1648 / Courtesy of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사치함에 대한 견제일까. 어쨌든 빌렘 칼프의 그림이나 암브로시우스 보스샤르트의 화병 같은 화려한 소재 외에 네덜란드 17세기 정물화에는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바니타스Vanitas(죽음을 담은 정물화)라는 장르도 있다. 프란스 할스의 ‘‘Young Man holding a Skull (Vanitas)’은 해골을 통해 구약성서 전도서 구절(‘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을 암시했다. 해골을 든 젊은이는 인간 삶의 끝을 상징한다. 그림 ‘Vanitas Still Life’에서 번쩍이는 투구와 그 앞 모래시계는 멈출 수 없는 시간과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뜻한다. 악보 위에 액체가 담긴 조개껍데기와 빨대는 금세 터져 사라져버리는 비눗방울처럼 인생의 덧없음을 나타낸다. 모두 현재를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가 담겼다.


Words & photographs by Joohyun Kim
Still. Courtesy of The National Galler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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