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편집: 2024년05월16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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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순이 아닌 주제별’ 큐레이션이 돋보이는 테이트 모던

‘연대기순이 아닌 주제별’ 큐레이션이 돋보이는 테이트 모던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 순서로 나열할 수 있다. 하지만 등장 인물이 여럿이라면 타임 라인 또한 여럿일 수 있다. 모두가 각자의 시간과 속도 속에서 삶을 꾸려 왔을 테니까. 예술 세계에서도 수많은 작가가 자기만의 타임 라인 위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 때문에 획일적인 연대기 같은 순 미술사는 바람직하지도,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미술관 대부분이 연대기형 전시 방식Chronicle Curation을 택해 왔다. 미술역사서의 성전처럼 여겨지는 곰브리치 미술사가 동양을 포함한 다른 문화권은 극도로 배제한 채 서양 미술을 중심으로 미술사 연대기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서술 방식은 ‘명작’ 혹은 ‘거장’에 집중하며 기득권자들의 미술 세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서양 미술에서 입체파 사조가 대두한 시기에 인도에서는 인도 나름의 미술 사조가 존재했을 터이다. 그리고 서양 미술과 인도 미술 중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뛰어난 가치를 지닌다고 결코 단언할 수 없다.
이렇듯 역사는 하나로 그어진 일직선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생동하는 물결이다. 요동치는 물결은 처음과 끝 그리고 위와 아래를 구분하기 어렵다. 테이트 모던은 미술사의 이러한 ‘생동성’을 인지하여 2000년대부터 연대기형 전시 방식을 버리고 주제별 전시 방식Thematical Curation을 택했다.

테마로 분류된 테이트 모던의 방 안에는 각 주제에 걸맞는 작품이 전시된다. ‘Artist and Society’에서는 현 사회의 긴급한 이슈를 되짚음으로써 대중을 일깨운 미술 작품에 주목한다. ‘In Studio: Studio Practice’에서는 작가의 사적 공간인 스튜디오를 탐험하여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 과정을 살핀다. ‘Material and Object’에서는 언뜻 생각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재료조차 독특한 방법으로 미술 창작에 사용되어 완성된 작품을 조명한다. ‘Media Networks’에서는 매스미디어가 이 시대 우리에게 끼친 거대한 영향에 대응하여 제작된 작품들이 전시된다. ‘Performer and Participant’에서는 19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된 참여에 대한 대중의 갈증을 달래려고 예술가들이 내놓은 작품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제별 전시 방식은 미술의 역사와 배경을 잘 모르는 일반인이 쉽게 예술에 다가갈 기회를 제공한다. 주제 의식이 가장 뚜렷한 세 가지 방 ‘Artist and Society’, ‘In Studio: Studio Practice’, ‘Material and Object’에서 각 방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을 한 가지씩 골라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Room 7 in ‘Artist and Society’

Jenny Holzer ‘Blue Purple Tilt’, 2007 / Courtesy of Jenny Holzer & Tate Modern

Jenny Holzer ‘Protect Me From What I Want’, 1985

Natalie Bell Building Level 2 West의 ‘Artist and Society’ 방에는 파란색 전광판 안의 텍스트가 경사면을 따라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다. 현대미술가 제니 홀저의 작품 ‘Blue Purple Tilt’이다. 글자를 작업 재료로 선택한 홀저는 정보 과잉 시대에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짧은 문구로 현대인을 일깨운다. 그는 특히 상업 광고에 주로 쓰이던 전광판을 성찰과 사색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전광판 안의 텍스트는 번쩍이거나 빠르게 움직이기도 하며 특정 어휘를 강조하고, 천천히 속삭이고, 크게 소리친다. 마치 작품이 우리에게 말을 걸듯이.

나아가 홀저는 종종 전통적인 갤러리가 아닌 공간에서 작품을 설치하는 ‘공공 미술’을 선보이기 때문에 보는 이에게 한 층 은밀히 다가간다. 가령 1985년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 안의 ‘Protect Me From What I Want’는 불특정 다수의 뉴요커에게 작가가 날린 일침이다. 덕분에 욕망과 소비로 점철된 도시 뉴욕을 살아가는 이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뒤돌아 볼 순간을 마주했다. 이와 같이 홀저는 예술이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일상에 뜻밖의 침투를 일으키기를 바란다. 어쩌면 아름다운 유화나 거대한 조각상이 아닌 전광판 작품은 첫눈에 예술이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많은 전통 미술 작품이 갖는 속성을 지닌다.  “미술인이 아니어도 모두가 작품을 이해하길 바란다"라는 홀저의 바람처럼 그의 글 조각은 쉽고 단순하지만 우리가 속한 현대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현대 미술 작품은 현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Room 2 in ‘In Studio: Studio Practice’

Alberto Giacometti, ‘Seated Man’, 1949 / Courtesy of Alberto Giacometti & Tate Modern

Alberto Giacometti, ‘Walking Man I’, 1960 / Courtesy of Alberto Giacometti & Guggenheim

부러질 듯 앙상한 몸과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빛.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온 힘을 다해 서 있는 가냘픈 인간상을 조각해 왔다. 하지만 20세기가 배출한 위대한 조각가로 평가되는 자코메티는 애초 조각가로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은 종종 자코메티의 대표적인 조각품만을 보게 된다. 사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없이 습작하는 과정을 통해 작업 세계를 만들어 왔으므로 조각품은 그 작업 세계의 작은 부분일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Natalie Bell Building Level 2 East의 ‘In Studio: Studio Practice’ 방은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숨겨진 가치를 찾으려고 스튜디오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연습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조각상을 만들기 전에 자코메티가 그린 인물화처럼 말이다. 자코메티의 인물화 ‘Seated Man’은 변화하는 시각적 인상을 담은 덧그린 선들로 가득한데, 작가가 대상을 얼마나 치밀하게 조사했는지 드러난다. 여기서 대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디에고(자코메티의 친형)이고, 스케치는 형의 이미지를 세밀하게 형상화하는 과정이었다.

연습 없이 완벽하게 점프하는 발레리나가 없듯이 모든 아티스트는 스튜디오에서 조용히 자기 실력을 연마한다. 자코메티는 스케치를 하면서 인물을 관찰하는 뛰어난 능력을 쌓은 덕분에 섬세한 입체감을 살리는 조각가가 되었다. 이렇듯 최종 작품과 함께 작가가 거쳐온 작업 과정을 엿보면 관람객은 작가의 숨은 노력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때 감동은 더욱 커진다.

Room 9 in ‘Materials and Objects’

Haegue Yang, ‘Sol LeWitt Upside Down – Structure with Three Towers, Spilt in Three’, 2015 / Courtesy of Haegue Yang & Tate Modern

Sol LeWitt, ‘9-8-7-6-5-4-3-2-1 half off’, 1977

Natalie Bell Building Level 4 West ‘Materials and Objects’ 방에는 사무실에나 있을 법한 하얀 블라인드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 작품은 ‘Sol LeWitt Upside Down - Structure with Three Towers, Expanded 23 Times, Split in Three’로 2015년부터 이어진 양혜규의 솔 르윗 뒤집기 시리즈 중 하나이다. 양혜규는 미니멀리즘 대가 솔 르윗(1928-2007)의 기하학적 구조물을 독특한 재료 ‘블라인드’로 재창조해 왔다. 때문에 작품에는 예술가의 역사적 정신이 깃들어 있으면서도, 새로운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전통과 혁신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500개가 넘는 베네치안 블라인드 주위를 거닐 때면 관람객의 발걸음과 그날의 빛에 따라 벽면에 비친 그림자가 움직인다. 사실 블라인드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오브제이다. 보통 바깥 세계로부터 내부 공간을 보호하려고 설치된다. 그래서 블라인드는 시야를 가리지만 공간을 확장하고, 개인적이면서 열려 있고, 납작하게 압축되었다가 이내 거대해지는 양가적 특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특성조차 현대미술을 통해 작품에 접목될 때 관람객은 더 넓은 의미에서 프라이버시, 가시성, 개방, 폐쇄 등을 고민해보게 된다.

양혜규의 블라인드 시리즈는 테이트 모던뿐 아니라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스톡홀름 현대미술관과 말뫼시 등 세계적 미술관들에 소장되어 있다. 미술관 안의 블라인드는 창문을 가리는 본래 기능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품게 된다. 그렇게 예술가의 손길은 일상적 오브제조차 비일상적 미술 작품으로 승격시킨다.

결국 미술을 감상할 때 가치 있는 일은 작품이 어느 시대에 속하는지,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 혹은 어느 나라 작가가 그렸는지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 소중한 이유는 미술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감상을 통해 자신만의 관점으로 작품의 의미를 반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미술사의 절대적 기준에 갇혀 설교하려는 듯한 권위적인 미술관은 이제 구시대적이다. 예술을 다리 삼아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수천 킬로미터 거리도 뛰어넘는 만남. 이러한 만남을 통해 관람객은 작품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에서 벗어난다. 그때 비로소 아티스트와 관람객의 진심 어린 마음이 서로 맞닿을 테니까.

Words by Rosie Suyeon Kang
Still. Courtesy of Tate
Still. Courtesy of Haegue Yang & Tate Modern
Still. Courtesy of Jenny Holzer & Tate Modern
Still. Courtesy of Alberto Giacometti & Guggenhe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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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넘어서, '야요이 구사마: 무한 거울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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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가 품은 어둡고 하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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